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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부정공>상호정기(相好亭記)
相好亭記 故僉樞趙公即孝子前副正虔谷之孫也虔谷公事父母至孝以麗朝副正入 我朝累徵以高官不就世宗嘉之命旌其閭曰前副正趙瑜之門其不稱我 朝官而特書前朝職名者實亦所以並褒其忠也其後世子孫殉國之偉烈事親之卓行屢屢有焉則皆公之敎也云僉樞兄弟四人同居順天謙川之上友愛甚篤名其燕遊之亭曰相好盖取斯干詩語也今其後孫秉謙將謀重修持幣走京師徵余文甚勤余惟斯干詩之首章曰兄及弟矣式相好矣無相猶矣張子釋之曰猶似也人情患在施不見報則輟故恩不能終不要相學己施之而己不要相學者無相猶之謂也己施之而己者式相好之謂也朱子又曰兄豈可學弟之不恭而遂亦不友弟豈可因兄之不友而遂忘其恭由是言之則爲此詩者其知處兄弟之道乎古之人有其弟射殺其驚牛妻曰叔殺牛曰作脯又曰叔殺牛異事又曰己知此豈非相好而無相猶之術耶然而人之爲兄弟方其幼也莫不相愛而及其長也亦或乖離盖以妻其妻子其子物我相形彼此角立長競短較厚絜簿甚至於視若仇敵此實由於相猶而不相好之致哀哉余嘗讀渼湖金公所爲虔谷之碣有曰公之孫某弟皆友愛常同枕被及讀南太史所爲旌考碑有曰公之孫某能世其家兄弟四人相友愛今去僉樞之世幾百年矣屢經兵火文籍散亡惜其事蹟無可徵者然而虔谷公以忠孝大節爲南州一人又二公之稱述乎虔谷公之成敎於家如此則斯亭之名義者其必有所受而深有得詩人之旨盖其平生喜怒哀樂利害得喪之除事變亦多端而相與各盡其心各秉其分惟知一氣之無間而不知形骸之有分則其寤寐起居嘯歌笑語雍雍怡怡之樂有可以俯仰想像者乎况張子之言曰君臣父子間亦皆當用此道然則趙氏忠孝友悌傳百世而不窮者豈無以者嗚呼吾於此抑又有所憾者余之兄弟亦四人矣亦粗嘗以相好爲勉而不幸二弟皆夭今余與伯氏俱以白首而余又廢疾癃痼楊津之匙著司馬之問飢問寒皆不能自力曾子所謂悌有不時者非此之謂歟余於記斯亭也重爲之慨也己 豊山 洪樂命 記 상호정기(相好亭記) 고첨추조공(故僉樞趙公)은 곧 효자 전부정건곡공의 손자이시다. 건곡공이 부모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기고 고려 부정으로 아조(我朝)에서 여러 번 높은 벼슬로 불러도 나아가지 아니하니 세종(世宗)이 아름답게 여겨 그 이문(里門)을 정표하되 전부정 조유(瑜)의 문이라 하였다. 아조 벼슬을 맡지 않고 특별히 고려의 직명을 쓴 것은 실로 그 충성을 아울러 포양한 것이다. 후세 자손이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친 거룩한 절열과 어버이를 섬긴 높은 행실이 누누이 있었던 것은 다 공의 가르침이었던 것이다. 첨추(僉樞) 형제 西인이 함께 순천땅 겸천 위에 살며 우애가 심히 독실하여 그 노는 정자를 상호(相好)라 이름하였으니 대개 사간시(斯干詩)의 말을 취한 것이다. 이제 그 후손 병겸(秉謙)이 장차 중수할 것을 꾀하고 서울로 달려와서 나에게 문자를 간곡히 부탁하므로 내가 사간시의 머리글을 생각한즉 형과 밑 아우가 서로 좋아하기를 바라며 서로 같음이 없게 하라 하였다. 장자(張子)가 해석하되 유(猶)는 사(似) 자와 같다. 인정이란 주고 난 다음 받지 못하면 근심하여 거두어 버릴까 걱정하게 되므로 은혜를 능히 마치지 못한다. 그러니 서로 받을 것을 생각하지 말고 다만 줄 따름이다라고 하니 서로 받을 것을 생각지 아니함은 서로 같음이 없이함을 말함이요, 다만 줄 따름이라 함은 서로 좋아함을 말한 것이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형이 어찌 아우의 공순하지 못함을 모방하여 마침내 우애하지 아니하며, 아우가 어찌 형의 우애하지 아니함을 따라 마침내 그 공순한 것을 잊어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이로써 말한다면 이 시 를 지은 자는 그 형제간에 처할 도리를 아는 사람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옛 사람이 그 아우가 그가 타고 다닌 소를 죽이니 그 처가 시숙이 소를 죽였다. 말하매 『포를 뜨라』 하고 또 시숙이 소를 죽였다 하매 『이상한 일이다.』 하고 또 가로되 『이미 알았다.』 하였으니 이 어찌 서로 좋아하고 서로 같음이 없는 술책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사람의 형제 된 자 바야흐로 그 어렸을 때는 서로 사랑하지 아니한 자가 없지만 좀 장성하면 또 혹 비뚤어져 멀어진 것은 대개 그 처를 처로 자식을 자식으로 알아 물건과 나를 서로 형상하여 피차 틀어져 길고 짧은 것을 다투고 두텁고 엷은 것을 헤아리며 심지어는 원수를 보듯 하게 되니 이는 실로 서로 같이하려만 하고 서로 좋아하려 하지 않는 이유이다. 내가 일찍이 미호(渼湖) 김 원행공이 기술한 건곡공의 묘갈을 읽어보니 「공의 손자 아무개 형제가 다 우애하여 항상 베개와 이불을 같이 하였다.」 하였고 이어 太史南有容公이 쓴 정효비문(旌孝碑文)을 읽어 보니 「공의 손자 아무개가 능히 그 세덕을 이어 형제 四인이 서로 우애하였다.」 말하였다. 이제 첨추공(僉樞公)과 세대의 거리가 몇백 년이 흐른 지금 여러 번 병화를 만나 문적이 흩어져 버리고 그 사적을 가히 증거할 수 없는 것이 애석한 일이나 건곡공이 충효대절로써 남쪽 고을의 一인이 되었고 또 건곡공이 가정에 교화를 이룬 것을 칭술(稱述)한 미호 남태사 두 사람의 말이 이와 같으니 이 정자의 명의는 그 반드시 받은 바가 있었으며 시인(詩人)의 뜻을 깊이 얻은 바 있었다 하겠다. 대개 그 평생 희노애락과 이해득실의 즈음에 있어 사변이 또한 수없이 많았을 텐데 서로 각기 그 마음을 다하고 각기 그 분수를 지켜 오직 한 기운의 사이 없는 줄 만 알고 육체의 구분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였으니 그 자고 깨며 일어나고 앉으며 휘파람을 불고 노래하며 웃으며 말할 때 화기애애하게 즐거워했음을 가히 구부리고 우러러 상상할 수 있겠다. 더욱이 장자(張子)의 말씀에 『군신 부자간에도 마땅히 이 도를 써야 한다.』 하였다. 그러고 보면 조 씨의 충효우제(忠孝友悌)가 천추를 전하여 다함이 없음이 어찌 이유가 없겠는가. 아! 내가 여기에서 서운함이 있는 것은 나의 형제도 四인이었기에 간략하게나마 일찍 상호로써 힘쓰긴 했지만 불행히 두 아우가 다 일찍 죽고 이제 나와 백 씨가 함께 백수가 되고 나 또한 폐질로 들어앉아 양진(楊津)의 시저(匙著)와 사마(司馬)의 주리고 추운 것 묻는 것을 다 능히 자력으로 못 하니 증자(曾子)가 이른바 우애가 때 아닐 때가 있다는 것은 이를 이룸이 아닌가. 내가 이 정기를 쓰면서 거듭 개탄할 따름이다. 豊山 洪樂命 기록함 註: 강굉(姜肱): 동한(東漢) 때 광척(廣戚) 사람인 강굉이 두 아우와 화목하게 지내면서 언제나 긴 베개를 함께 베고 잤다 한다. 장자(張子): 송(宋)나라 때 학자인 장재(張載)를 말함. 호는 횡거(横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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